권진이 아가타

Agat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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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권진이 아가타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몰락 양반 권 진사와, 독실한 신앙인 한영이 막달레나(Magdalena) 사이에서 태어났다. 권 진사는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외교인이었던 아내에게도 가르쳐 함께 입교하게 했다. 당시 조선에는 사제가 없어 성사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임종 직전에야 영세를 받았고, 가족들도 그때 함께 세례를 받았다. 남편을 잃은 한영이 막달레나는 가난 속에서도 남편의 유언에 따라 수절하며 딸 아가타를 정성껏 키워냈다.

아가타는 성장하면서 빼어난 미모와 단단한 신앙심으로 교우들 사이에서 칭찬을 받는 규수로 알려졌다. 13세에 혼인하였으나, 시골에 살던 남편이 지나치게 가난해 신부를 데려갈 형편이 되지 못해, 아가타는 남편의 친척인 정하상 바오로(Paulus)의 집에서 살림을 맡아 지내게 되었다.

이 무렵 조선에 입국한 유방제(파치피코) 신부의 집에서 아가타는 살림을 도우며 지냈다. 그녀는 총명하고 온화하며 여러 재주를 갖춘 인물이었기에 신부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아가타가 동정을 지키고자 하는 뜻을 밝히자, 신부는 그녀가 남편과 동거하기 전이었음을 확인하고 혼인을 무효화하여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이 일은 사람들 사이에서 좋지 않은 소문을 낳았고, 아가타에게 큰 시련이 되었다. 이후 모방 나 신부가 입국해 소문을 바로잡아 주었고, 아가타는 그의 따뜻한 권고를 받아 새롭게 신앙의 길을 걸어갈 용기를 얻었다.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가 어머니와 함께 기도와 보속에 힘쓰며, 자신의 실수로 신앙에서 흔들렸던 이들을 오히려 덕의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다. 아가타는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순교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던 중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들이닥쳐 1839년 7월 17일 밤, 어머니와 이 아가타, 그리고 권 아가타가 함께 체포되었다. 관원은 어머니만 옥에 가두고 두 아가타는 사관청에 두어 옥졸에게 맡겼다. 이때 배교자 김여상이 아가타에게 도망을 제안했으나, 아가타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포졸들 중 일부가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에 마음이 흔들려 탈출을 도와주었고, 아가타는 이 아가타와 함께 도망했다. 사건이 드러나자 포장은 파직되고 군졸 한 명은 사형, 두 명은 귀양을 가는 처벌을 받았다.

이후 권 아가타는 다시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았으나, 신앙은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형조로 이송된 뒤에도 세 차례의 심문과 고문을 견디며 처음의 마음을 굳게 지켰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관헌은 그녀가 “사도를 행하고 귀신을 섬기는 요술쟁이”라는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워 처형을 결정했다.

1840년 1월 31일, 그녀는 먼저 순교한 어머니의 뒤를 따라 당고개에서 21세의 젊은 나이로 순교했다. 그녀의 굳센 신앙과 순교의 삶은 한국 교회 안에서 깊은 울림을 남겼고,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념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